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나치 독일 (문단 편집) === [[학문]]과 [[문화]]의 손실 === 나치당 휘하의 독일은 학문적으로도 큰 손실을 겪었는데, 전쟁 전에는 나치당의 억압적인 분위기와 유대인 탄압을 피해서, 전쟁 후에는 안정적인 생활을 찾아서 많은 독일 과학자들이 타국으로 망명하게 되었다.[* 사실 1919년 이후로 독일이 옛날만큼 우위를 점하고는 있지 않았다.] 여기에 가장 이득을 얻은 국가가 [[미국]]으로, 미국이 전후 과학계의 중심이 되는 데는 독일계 미국인 과학자들의 공적도 컸다.[* 하지만 미국 과학은 늦어도 [[1930년대]]부터는 독일과 서유럽을 추월해 웃돌기 시작했다. 독일계 과학자들이 없었으면 미국 과학이 세계의 중심이 될 수 없었다 식의 진술은 옳지 않다. 추가적인 도움이 됐다는 정도로만 알아두자. 애당초 한 나라 학계의 과학이라는 게 한두 사람의 노력이나 이동으로 좌지우지되는 것이 아니다.] 그 유명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도 중립국인 [[스위스]]에서조차 위험함을 느껴서 미국으로 가지 않았는가? 미국의 로켓 기술은 독일의 [[V2(로켓)|V2]]를 개발한 [[베르너 폰 브라운]]이 밑천을 닦고. 물론 '부자는 망해도 3년 간다'는 속담처럼 독일도 완전히 밑천이 날아가지는 않아서 여전히 과학 기술력이 뛰어난 국가이기는 하지만, 세계 과학계의 중심에서는 밀려나게 되었다. 특히나 [[수학]]에서 이러한 경향이 심한데, 당시까지만 해도 세계 수학의 중심이었던 [[괴팅겐 대학]]이 나치로 인해서 몰락하고 학자들은 모두 타국으로 가게 된다. [[다비트 힐베르트]]는 이런 상황을 보고 괴팅겐에 더 이상 수학은 없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그래도 현재는 순수 과학 분야의 [[막스 플랑크 협회]] 연구소와 응용 과학 분야의 프라운호퍼 연구소가 서로 경쟁하며 독일 과학의 발전을 이끌고 있다. 음악을 듣는데 사용하는 [[MP3]]도 알고 보면 독일 '프라운호퍼'의 기술이기도 하다. 말인 즉슨 옛날 명성이 무색해질 정도의 변방은 아니라는 소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경제력을 기반으로 과학 기술 분야에 막대한 투자를 퍼붓는 '''미국'''이 버티고 있는 한 옛날 명성을 되찾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특히나 로켓 기술 분야는 개발진이 미국과 소련, 영국으로 넘어가버렸고 각종 규제도 가해지면서 사실상 복구가 불가능해진 상황이다.[* 단적으로 전투기만 봐도 현재 독일군이 전차나 다른 육상병기는 자체 개발해서 쓰지만 전투기는 아닌 것만 봐도 답 나온다. 그러나 이는 독일이 독자개발할 여력이 되지 않아서(기술, 자본 등)이지 [[유로파이터 타이푼]]처럼 유럽 합작 전투기는 잘만 만들어내고 있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박해 받았으며, 결국 베를린 대학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히틀러가 핵물리학을 '유대인 물리학' 드립치면서 폄훼하기도 했다.] [[프리츠 하버]] 역시도 [[비료]]를 개발해내고 조국을 위해 [[독가스]]까지 개발한 사람이건만 단순히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배척당했고 결국 하버도 망명해야 했다. 남아있던 하버의 친족들은 [[치클론 B]]에 의해 학살당했다. 대표적인 사회주의 학자의 본산이었던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도 멤버들이 유대계 출신이 많았고, [[마르크스주의]]를 전파한다는 이유로 나치의 탄압 끝에 폐쇄되었다. 소장인 막스 호르크하이머는 스위스로 도망쳤으며 다른 멤버들도 프랑스, 영국, 스위스 등으로 피신했다. 이 멤버들 중에는 [[에리히 프롬]], [[테오도르 아도르노]] 같은 사회과학계의 거성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결국 미국으로 옮기게 되었다.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도 단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자체가 '''유대인의 허섭쓰레기 학문'''이라는 규정을 받았고, 나치 집권 이후에 처음으로 열린 심리학 대회에서는 정신분석학 학자들의 참가가 금지되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오스트리아가 합병된 이후로 프로이트는 살해 위협까지 받게 되자[* 노령의 프로이트 본인을 직접 건드리진 않았지만, 프로이트의 딸인 안나가 체포되어 하루 동안 심문을 받고 나서 풀려난 일이 있었다.], 프로이트는 결국 가족을 위해서 오스트리아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문화계로 보면 나치당의 문화 탄압 때문에 독일의 문화계도 큰 타격을 받아서 후퇴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출판, 영화, 연극 분야에 활동을 많이 하던 유대인들은 거의 예외 없이 국외로 빠져나갔다. 특히나 영화 산업은 1920년대 유럽 전체에서 제작되는 영화 수보다 독일 내에서 제작되는 영화가 더 많을 정도로 번성했고, 미국의 [[할리우드]]에 이어서 두 번째로 번성했지만 나치당의 집권 이후에는 괴벨스가 영화 산업을 통폐합하면서 거의 국영화시켜 몇 개 회사만 남겼고, 정권 찬양적 홍보 영화나 반유대주의 영화만 찍어내게 된다. [[독일 영화]] 문서를 참고하면 알겠지만 견디다 못한 [[프리츠 랑]]이나 [[빌리 와일더]] 같은 내로라 하는 독일 영화 인재들이 영국이나 미국 같은 곳으로 망명해버렸다. 오죽하면 나치 독일이 영미권 영화계에게 인재를 퍼다줬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 이렇게 흘러 들어온 독일 영화인들은 표현주의가 할리우드에 정착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사실 이전부터 무르나우 같은 예도 있었지만 뇌관을 제대로 때린 셈.] 후폭풍도 매우 심해서 뉴 저먼 시네마로 대표되는 독일 전후 영화는 나치 독일 영화의 철저한 안티테제를 내세울 정도였다. 연극계는 우익이나 민족주의 성향이 멀었기 때문에 역시 직격탄을 맞았고, 문학계에서도 <[[서부 전선 이상 없다]]>로 국가공인 좌빨 선고를 받은 레마르크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 등 유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선고 받은 작가들도 나치 독일을 떠났다. [[베르톨트 브레히트]] 등 좌파 예술인들이 탄압 받다가 망명했으며, 망명하지 않은 [[케테 콜비츠]]는 비참하게 살아야 했다. 유대인이었던 [[멘델스존]]의 음악도 당연히 금지 당했다.[* 동상 철거에 반대한 라이프치히 시장 카를 괴를데러는 시장직에서 짤렸고, 나중에 [[발키리 작전]]에 가담했다가 발각되어 처형 당한다.] 2차대전 시기에는 러시아와 폴란드 작곡가의 연주도 금지 당한다. 다른 예술 분야에도 나치당의 잣대로 '유대적인 요소'가 들어갔다 선언하면 탄압을 면치 못했다. 히틀러는 자신이 이해하기 어렵다라는 이유로 현대 예술을 매우 증오했으며, 단지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유대인 출신 예술가들과 과학자들을 박해했다. 히틀러는 인체를 새롭게 재해석한 [[입체파]] 등의 새로운 예술 사조를 '인체 공부를 게을리한 화가가 그린 3류 작품'으로 깎아내리고 이것이 독일 국민의 정서에 나쁜 영향을 준다는 명목 하에 [[퇴폐미술]]로 분류하고 탄압한 반면, 누구나 이해하기 쉽지만 표현이나 창의력이 다소 제한된 [[신고전주의]]는 우대했다. 이에 나치는 [[모더니즘(미술)|모더니즘 미술가]]들의 작품을 퇴폐미술로 낙인찍고 대대적인 박해를 가했다. 이에 견디지 못한 예술가들은 작품 활동을 포기하거나 해외 이주를 택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예술가들이 추방 당하거나 온갖 수모를 당했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히틀러가 [[세계수도 게르마니아]]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독일의 수많은 문화 유산들이 깡그리 박살났다. 유네스코 문화유산급 건축물들이 불도저에 박살났다. 발터 그로피우스가 주도하던 [[바우하우스]][* Bauhaus, 바이마르 공예학교.]도 유대적 바우하우스 악질 문화라는 나치의 비난을 받으며 학교가 폐쇄되었고, 함부르크의 바르부르크 예술사 연구소도 설립자가 유대계라는 이유만으로 박해를 우려해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연구소를 영국으로 이전해버렸다. 나치의 탄압을 받은 지식인들과 예술가들은 대부분 유럽을 거쳐서 결국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미국은 비록 반유대주의적인 성향의 인물들이 이러한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불쾌하게 여기기는 했어도 이들을 받아들이고 구해내서 제2의 터전이 되었다. 나치 집권 이후에는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국외로 이주하면서 대학 교수급 석학들도 800명이나 빠져나갔는데, 이 중에는 [[노벨상]] 수상자가 20명이었다고 한다.[* 니얼 퍼거슨 저 <증오의 세기> 서적으로.] 물론 그들이 미국의 과학 발전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핵무기를 만들어낸 [[맨해튼 프로젝트]]에 종사했던 상당수의 고급 과학자들이 바로 나치의 탄압으로 인해서 미국으로 망명한 사람들이다. 결론적으로 2차대전에서 미국이 승리하는 데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세계 1차대전 이전에 이미 미국은 경제력에서 유럽을 뛰어넘은 세계 최강국의 위치에 서 있었다. 그저 [[고립주의]] 정책으로 외부에 그것이 표출되지 않았을 뿐이다.] 실제로 이 당시 미국으로 옮겨간 수학자들의 활약으로 미국은 전세계 최고의 8개의 수학 연구소 중 3개를 보유하고 있는 반면 독일에는 단 하나도 없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